120억원이 걸린 ‘도장없는 유언장’
2003. 11. 사망한 김모씨가 자신의 재산 123억여원을 모대학에 기부한다는 뜻을 친필로 작성해, 은행에 남겼습니다. 유족은 김씨가 숨지자 은행에서 예금을 출금하려다 거절당하면서 유언장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유족들은 그 해 12월 “유언장에 날인이나 손도장이 없어 무효”라며 은행을 상대로 예금반환 청구소송을 냈고. 김씨의 기부 의사를 뒤늦게 알게 된 대학에서도 소송에 참여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내 소유로 되어 있는 120억원의 예금은 모대학에 기증하겠다. 2003. 0. 0. 유언자 *** -이상-’
아무리 보아도 유서의 글씨는 망인의 글씨체였습니다. 다만 유언장에는 유언자의 도장이 찍혀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유족들은 상속재산을 물려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유언의 효력이 인정된다면 유족들은 아무런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고 그 중 일부에 대하여만 유류분권이 있을 뿐입니다.
민법에 의하면 법에서 정한 유언의 방식에 따른 것이 아니면 유언으로서 효력이 없습니다. 민법 제1066조 제1항은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은 유언자가 그 전문과 연월일, 주소, 성명을 서하고 날인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위와 같이 직접 자필로 작성한 유언장이라고 하더라도 유언자의 날인이 없는 유언장은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으로서의 효력이 없다고 하는 것이 대법원의 판례입니다. 위 사건에서도 역시 유언은 효력이 없다고 판결하였습니다.
이처럼 엄격하게 유언의 방식을 규정한 것은 유언자의 진의를 명확히 하고 그로 인한 법적 분쟁과 혼란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므로, 법정된 요건과 방식에 어긋난 유언은 그것이 유언자의 진정한 의사에 합치하더라도 무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수많은 판결이 있습니다.
모 대학에서는 120억원을 증여받을 기회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대학은 “유언장에 자서(自書)와 동시에 날인(捺印)을 하도록 규정한 조항은 유언의 자유를 비합리적으로 제한하고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습니다. 그 근거로는 “유가증권의 경우 날인을 대신해 서명의 효력을 인정하고 있고, 국제적으로도 서명과 날인을 동시에 요구하는 국가는 우리나라와 일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유언을 하려는 분들은 ‘죽으면서도 내 맘대로 못하냐’고 불만이 있으시겠지만 죽기 전에 유언의 방식을 신경쓰시는 것이 돌아가신 후 산 사람들의 싸움을 피하는 길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